Books · Quotes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민음사) 2020/02/23 00:59 by rawbittna

왜냐하면 위대한 생각이 모두 그렇듯 여기엔 원래 시작이라는 거시 없으며, 생각이 있는 곳이라면 유희는 늘 있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리알 유희가 생각이나 예감, 소망의 모습으로 이미 이전 시대에 몇번이고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에게서, 그 후 고대 문화의 후기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그노시스파에게서, 또 그에 못지 않게 고대 중국인에게서, 긔고 다시 아라비아인의 정신생활의 절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다시 더 나아가 스콜라 학파와 인문주의를 지나 17세기와 18세기 수학자 아카데미와 낭만주의 철학, 그리고 노발리스의 마술적 꿈인 루네 문자에 이르기까지 그 전사의 자취는 계속 이어진다.

학문과 예술의 종합이라는 이상적 목표를 지향하는 모든 정신의 움직임에는, 모든 플라톤적 아카데미, 모든 정신적 엘리트들의 교류, 정밀과학과 보다 자유로운 학문을 근접시키려는 모든 시도, 학문과 예술 혹은 종교를 화해시키려는 모든 시도의 밑바닥에는 바로 저 생각, 우리에게선 유리알 유희라는 형태를 취하는 저 영원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저 중국의 신기한 전설에서처럼 '몰락의 곡조'가 울려 퍼졌는데, 그것은 마치 파이프오르간의 길게 끄는 저음부처럼 몇 십 년 동안 울리면서 학교나 잡지, 아카데미에는 부패의 모습으로 흘러들었고, 아직 진실성을 잃지 않고 있던 예술가나 시대 비평가에게는 우울증과 정신병으로 흘러들었으며, 모든 예술에는 거칠고 천박한 과잉 생산으로 날뛰었던 것이다.


바로 이 몰락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즉 예술가나 교수, 잡문 기자에 의해 완전히 자포자기에 빠져 버리는 듯이 보이는 동안 그것은 개개인의 양심 속에서 첨예한 각성과 자기 점검에 이르고 있었다. 이미 잡문이 한창이던 시기에 정신에 충실하고, 좋은 전통이나 교육, 방법, 지적인 양심의 핵심을 온 힘을 다해 이 시대를 넘어 저편으로 구해 내겠다고 결심한 소규모 그룹들이 도처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의 우리 문화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 근원에 다가섰다. 가장 중요한 근원 가운데 하나는 최신의 학문인 음악사와 음악 미학이고, 그다음이 잇달아 일어난 수학의 비약적인 발전이며, 거기에 동방 순례자들의 지혜에서 나온 한 방울의 기름과, 음악의 새로운 이해와 해석에 아주 긴밀히 관련된 문화의 수명 문제에 대한 저 체념적이고도 명랑하며 의연한 태도의 확립이 더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같다. 그런 것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새로운 태도, 아니 그보다 문화 진행 과정으로의 이 재편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는 작품 창작에 있어서의 광범위한 포기와 차츰 진행된 정신적인 사람들의 세상사로부터의 유리,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그 모든것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리알 유희이다.


음악이 타락하면, 그것은 정부나 국가가 몰락할 분명한 징조였다. 또 시인들은 하늘을 거역하는 악마적이고 금지된 곡조, 예를 들어 정성이나 흉성의 음조, 즉 '몰락의 곡조'에 대한 무서운 전설을 이야기했다. 왕궁에서 그 괴이한 가락이 연주되면 금방 하늘이 어두워지고 성벽이 흔들려 무너지며, 왕과 그 나라는 망했다는 것이다. 옛 작가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대신하여 여불위의 <여씨춘추> 음악편에 있는 몇 대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음악의 기원은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음악은 도량에서 생겨나며 거대한 하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대한 하나는 양극을 낳고 이 양극이 음과 양의 기운을 낳는다. 천하가 태평하며, 만사가 안정되고, 만물의 변화가 위를 따르면, 음악이 이루어진다. 욕망과 정열이 그릇된 길로 흐르지 않으면 음아은 완성되는 것이다. 온전한 음악에는 그 이유가 있다. 온전한 음악은 평형에서 나온다. 평형은 바름에서 나오고, 바름은 천하의 뜻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천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더불어 음악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음악은 천지의 조화와 음양의 일치에서 기인한다. 무너지는 나라나 몰락하는 인간에게도 음악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음악은 청랑하지 못하다. 따라서 음악이 음란해질수록 백성은 더욱더 우울해지고, 나라는 더욱더 위태로워지며, 군주는 더욱더 천해진다. 이렇게 해서 음악의 본질 또한 잃게 되는 것이다. ..."

이 중국인의 글은 우리에게 거의 잊혀 버린 모든 음악의 원래 의미와 기원을 아주 명확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 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에게로, 즉 신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옛날의 경건한 사상가들이 피조물의 삶을 신에게로 가는 도정으로 묘사하고, 현상계의 다양성을 신적인 단일성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고 규명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처럼, 유리알 유희의 도형과 공식은 완전한 것, 순수한 존재, 완전히 이러어진 현실을 향해 모든 학문과 예술에서 나온 세계 언어로 유희하고 노력하면서 짓고, 연주하고, 철학했던 것이다.

'실현시킨다'는 말은 유희자들이 즐겨 쓰던 표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생성에서 존재로, 가능한 것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도정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불굴의 의지, 죽음을 무릅쓴 용기, 기사도 정신, 초인적인 웃음소리와 불멸의 청랑함이 울리고 있다. 우리의 유리알 유희에도, 우리의 전체 삶과 행위와 고뇌에도 그런 울림이 깃들어야 한다."


자기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음악의 배후에서 정신을, 법칙과 자유를, 봉사와 지배를 훌륭히 조화시키는 힘을 예감하며 그는 이 정신과 명인에게 그의 온마음을 바치고 있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이, 그리고 온 세상이 이 몇분 동안에 음악의 정신에 이끌려 질서가 잡히고 해명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소명의 과정을 체험한 것이었다. 성사라고 불러도 좋을 일이었다. 다시말해 그때까지는 그저 어린 영혼이 부분적으로만 전해 들었고 불타는 듯한 꿈을 통해서나 알고 있던 이상 세계가 눈앞에 보이게 되고 그를 부르는 듯 문을 활짝 연것이었다.  그 세계는 어디 먼곳에, 과거나 미래에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작용하고 빛을 뿜었고 사신이나 사도 혹은 사절을, 이 노명인과 같은 인물을 파견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소년이 그의 본성 전체에 좀더 높은 의미에서 음악가가 될 자질, 즉 혼신을 다해 빠져들고, 적절하게 전체에 자신을 맞추고, 공경심을 가지며, 경배에 봉사할 자질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명에는 여러 종류와 형식이 있지만 그 체험의 핵심과 의미는 항상 같다. 즉 내부로부터의 꿈이나 예감 대신에 갑자기 외부로부터의 부름과 한가닥 구체적 현실이 나타나 관여하게 됨으로써 영혼이 깨어나고 달라지고 고양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느꼈고 자신과 세계 사이의 새로운 긴장과 조화를 느꼈다.

이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 학생이 자신의 위치와 외적인 운명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교사들로부터 동료처럼, 아니 언제라도 떠날 귀한 손님처럼 대해지는 것을 보고, 동급생들로부터 반쯤은 경탄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반쯤은 따돌림과 의심을 받으며 몇몇 적수로부터는 조소와 미움을 받고 이제까지의 친구들로부터 점점 더 유리되고 혼자 남겨지는 것을 보았을때 그때에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도 유리와 고립의 똑같은 과정이 오래전에 완결되어 있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할때는 이미 의사나 법률가나 기술자가 되기 위해 꼼짝 못할 교과 과정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여러 시험을 치러야 간신히 그 과정을 끝내게 되네. 시험에 합격하면 면허장을 받고 그러면 이제 다시 자기 전공대로 나아갈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나 그럼으로써 그는 저속한 힘의 노예가 되어 성공이니 돈이니 명예니 공명심이니 하는 것 따위에 매달리고 남의 마음에 드는 일 따위에 좌우되게 된다네.



우리의 사명은 대립을 옳게 인식하는 일이야. 우선은 대립으로서, 그러나 그다음에는 단일의 양극으로서. 이점은 유리알 유희에서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모두 그저 인간일 뿐이고, 각자가 하나의 시도이며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네. 그렇지만 그 인간은 완성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야 해. 중심을 향해 노력해가야지 가장자리로 빠져나가려 해서는 안돼. 알아두게. 엄격한 논리학자나 문법학자이면서도 동시에 공상이나 음악으로 가득찰 수 있다는 것을. 음악가나 유리알 유희 연주자이면서도 온전히 법칙과 질서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렇게 되려 하는 인간이란 언제라도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다른 것으로 바꿀수 있고, 유리알 유희 속에 가장 명쾌한 논리를, 문법 속에 가장 창조적인 환상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지.


"무엇에든 유능하고 모든 것에 공정하게 되려면 분명 정신력이나 활기, 열정에 있어서도 마이너스 아닌 플러가 요구되지. 자네가 정열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이 아니라 영혼과 외부 세계 사이의 마찰일 뿐이야. 격정이 우세해지면 욕구하고 추구하는 힘에 플러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뿔뿔이 흩어진 잘못된 목표를 향해 있기 때문에 긴장과 숨 막히는 분위기가 형성될 뿐이지. 욕망의 추진력을 극도로 집중시켜 중심으로 참된 존재로 완전으로 향하도록 해 놓은 사람은 격정적인 사람보다 평온해 보이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에게서 좀처럼 열정의 불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네. 예를 들어 그런 사람은 논쟁을 하더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휘두르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의 내면은 뜨겁게 타고 있지!"



그 세계를 바르게 평가하고, 그 세계에 대한 나름의 권리를 가슴속에 간직하되, 그 세계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는 것, 그것이 과제 였다. 왜냐하면 카스탈리엔적 정신의 세계가 인공적이지만 보다 질서가 잡히고 더 잘 보호되어 있으나 끊임없는 감독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 세계, 성직의 질서가 이기 떄문이었다. 거기에 봉사하면서도 저 다른 세계에 대하여 부당한 태도를 취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또 애매한 소망이나 향수를 가지고 그쪽을 곁눈질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작은 카스탈리엔의 세계는 저 커다란 세계에 봉사하고 그곳에 교사와 책과 방법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정신이 제 기능을 다하고 도더이 순수하게 유지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또 인생을 정신과 진리에 바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듯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학교로서 피난처로서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 수 주일, 수 개월 동안의 내 정신적, 도덕적 생활이 샅샅이 분석되었지. 그런 다음 그는, 그 요가 수행자는 갑자기 말을 끊고 치묵해 버렸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잘못이 그래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나?' 하는 것이었어. 정말 나는 알 수가 없었네. 그러자 그는 내게 물었던 모든 것을 놀랄만큼 되짚어 가면서 피로와 불쾌감, 정신적 침체의 첫 징후에까지 거슬러 올라갔지. 그러고는 이러 증세는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게 계획 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자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잃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제어 능력을 내가 이제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되찾아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알려 주었네.


사실 그떄부터 난 그 등한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집중해 침잠하는 능력을 서서히 회복시키기 위해서만이라도 학교에서 하는 명상의 기초 연습으로 돌아가야 했네.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원리가 크네히트와 데시뇨리에게서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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